2016년 5월 29일 일요일

펌) 19세기 후반 사무라이 사진

* 주의) 오래된 사진들이라 조금 으스스합니다




1863년~1900년 사이에 촬영된 사무라이 사진들
보정이 많이 들어간 것 같네요.

그런데 여자 사무라이도 있었나요?











































quiz



1. 부부 둘 모두 유명한 명사



2.  (힌트) 영화계




3.



4.


5. 난이도 최하



6.



7. (힌트) 뮤지션




8.



9.


2016년 5월 14일 토요일

영화 <곡성> 리뷰

* 일부러 곡성관련 기사나 리뷰는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순전히 개인적인 조악한 감상문이니 터무니없어 기가 차더라도 이해해주세요.


개봉 2일차에 영화 곡성을 봤습니다.

제 개인 의견으로는 -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결말, 
개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내러티브를 수용하실 수 있으면 꼭 보셔야 하고요.

모리어티 교수같은 일생일대의 풍적수를 찾는 경찰관의 이야기, 
이견이 없는 완벽한 결말을 기대하셨다면 실망스러운 영화입니다.
던져주는 떡밥 물고 달리는 거 좋아하는 저같은 사람은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영화지요 ^^



주의! 
줄 아래로는 스포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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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은 어떤 시련이 닥쳤을 때 그 동안 지탱해 온 '믿음'이라는게 얼마나 취약한지, 
그 '믿음'의 허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호젓한 어느 강가, 낚시바늘에 미끼를 꿰는 사람의 손을 클로즈업하며 시작합니다.
수면 아래의 수많은 물고기 중 어느 물고기는 이 미끼를 덥썩 물고 올라오겠지요.
불행은 이 낚시와 같아서 우연히 미끼를 물게 되는 존재에게 닥치는 것. 
인과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인공 종구의 비극은 왜 하필 내 딸에게 불행이 닥쳤는지 타당한 이유를 찾으려다가 
미끼를 물고 미혹에 빠진 것이고요.

곡성은 절대 선과 절대 악, 종교에 대한 터부까지 영리하게 건드리면서 
내가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에 의해 완전히 재편되는 세계와
뒤틀리는 서술을 보여줍니다.


곡성군수의 미문으로 반전이 있기 전, 
실제 지역명을 제목으로 차용함으로써 큰 잡음이 있었던 '곡성'이란 지명은 
한자를 달리쓰고 음가만 가져 온, 
긴 울음소리와 비명이 공명하는 가상의 공간입니다.

영화 '곡성'에서 조용한 시골마을을 다루는 방식은
이전의 영화들과 사뭇 다릅니다.

아무렇게나 자란 잡목으로 빽빽한 짙은 녹색의 야산, 
가난함에 가까운 소박한 마을의 구석구석을 보여줄 뿐 
대도시와 대비되는 절경이라 할만한 풍광이나 정취라고 표현할 만한 일상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재난이 들이닥치기 전의 평온한 일상, 아이들의 웃음,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는 클리셰가 이 극엔 없군요.

이 영화의 모든 씬은 '곡성'이라는 공간안에서 진행됩니다. 
외지에서 들어 온 사람은 있지만(외지인, 무속인 일광) 탈 곡성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꽉꽉 닫혀있는 공간에서 극악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고
이제 곡성은 멀쩡한 사람이 가족을 죽이고 또 죽어나가는 곡소리 드높은 통곡의 골짜기가 되어갑니다.

불가해한 미스테리를 소재로 삼고 있는 극에서 흔히 설명하는 틀로 이해하자면, 
산자와 죽은자, 살았으나 죽은 자, 죽었으나 살아있는 자가 공존하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있는 곳이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그 경계의 모습은 
강을 건너거나 환한 빛 속으로 걸어가는, 
신비롭기 그지없는 흔한 임사체험의 순간이 아니라
일가족 몰살이라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비극적인 지옥도의 모습입니다.


주인공 종구는 박수 일광에게 묻습니다. 
왜 하필 내 딸이냐고. 내 딸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어린 것이 그런 변을 당하냐고.
(기억력이 시원치않아 워딩은 정확치 않습니다 ;;)

일광은 그냥 그 놈이 던진 미끼를 네 딸이 덥썩 물었던 것 뿐이라고, 다른 이유는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첫 씬의 그 낚시처럼요.
(물론 후에 일광은 
 적극적으로 주인공을 끌여들이기 위해 며칠 전 주인공이 외지인에게 행한 일 때문이라는 
 인과관계를 만들긴 합니다)


이 무속인 일광이 외지인과 연관되어 있음은 일찌감치 등장초반에 보여주는데요.

감독은 종구의 집에 온 일광이 옆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씬을 일부러 넣었는데 
하의를 벗은 일광은 외지인처럼 훈도시를 입고 있습니다.

극에서 일광과 외지인은 악의 축, 
첫 조우에서 주인공에게 계속 돌을 던지며 주의를 환기시켰던 무명은 악을 저지하려는 선
(결계를 쳤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대립구도로 보여주고 있고

과학 (부검결과 독버섯 중독으로 인한 정신착란)
종교 (엑소시즘. 악마를 벌하려는 부제)
무속신앙 (박수 일광)
부두교, 밀교, 흑마술?, 사술 등 주술적인 의식들 (외지인)
이 네 가지 힘이 음습한 소용돌이를 만듭니다.

극에서 유일한 팩트는 '착란을 일으키는 독버섯 중독'으로 인한 환각'이라는 부검결과입니다.

이후에 전개되는 지옥도는 
주인공이 독버섯을 먹고 착란 상태에서 전개된 망상인지,

단지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것 뿐이라며 치부할 수 없는, 불가해한 현상이 정말로 발생했으며
 '누구의 말을 믿느냐' 기로에 선 주인공의 선택으로 
끝내 악이 승리하는 이야기인지

어느쪽이 맞고 어느쪽이 틀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신을 섬기는 사제는 
초자연적인 귀신의 농간을 어찌 믿느냐며 의사를 믿으라고 합니다.

외지인은 '너는 악마다'라 외치는 부제에게, 
'내가 (악마가 아니라고) 항변해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차피 너가 믿는대로 내 형상이 보일 것이며' 라고 말하면서
(워딩은 정확치 않아요. 메모를 하면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손바닥의 못자국을 보여줍니다. 
공포로 쳐다보는 부제의 모습 클로즈업
다시 악마의 모습으로 변하는 외지인

나홍진 감독이 이 영화에서 그리는 악마의 외양과 식별적인 행동은(날것을 먹는 생식 등) 
구전되어 오던 옛이야기와 그림책 삽화에 묘사된 전형적인 악마의 모습을 따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악마는 실제로 이 모든 참극을 설계한 설계자가(다크나이트에서의 조커, 'schemer')아니라 
독버섯을 먹은 인물들의 환각속에서 친숙한 악마의 모습으로 등장한 가공의 존재일 수도 있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죽었으나 죽지않은 시체들, 살아있으나 이미 영혼은 있지 않은 사람들도
(파출소 출입문의 하얀 옷을 입은 여자 등)
수없이 많은 동화와 공포영화, 삽화에서 익숙한 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제 발생한 이야기라는 주장을 각하할 수 있는 근거도 없습니다.

어쨌든 초자연적인 힘의 개입 없이는 설명되지 않을 미스테리한 일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했고
악의 축으로 의심받던 외지인은 부제에게 악마의 모습과 행태를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첫번째 몰살 장소에서 클로즈업 한 해골의 형상을 한 식물을
마지막 참극이 벌어진 주인공의 집에서 다시 클로즈업하여
무명이 이번에도 악에 졌음을 보여준 것도
착란이라기엔 너무 정교했지요.


이렇듯 이 영화에서 감독은 관객에게 제대로 미끼를 던집니다.
이 미끼를 덥썩물고 어떤 인상을 받고 어떤 해석을 채택할 지
전적으로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고요 ^^


저는 이 영화가 상업영화를 지향하는 감독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성취라고 생각하고요.

특히 
영화 도입부의 성경구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누가복음 24장 37절)"라는 구절을 

외지인과 부제의 씬에서 비틀어
내 몸을 만져보라 하며 과연 살과 뼈가 없냐고 묻던 외지인이
손과 발에 선연한 못자국을 보여주고
상상할 수 없는 혼란과 공포에 빠진 부제 앞에서
사악하게 웃으며 악마의 모습으로 변하던 그 씬은 한국영화의 최고의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